김정일 對 '장마당'의 10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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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식(조선일보 논설위원)
中東 시위에 놀란 김정일 소문 차단키 위해 장마당 단속에 나섰다
그러나 北 권력은 10년에 걸친 장마당과의 전쟁에서 번번이 패했다
북한 소식통들에 따르면 요즘 평안북도 신의주 일대는 전시(戰時)를 방불케하는 살벌한 분위기라고 한다. 최근 벌어진 두 사건 때문이다.
지난달 15일쯤 국경경비대 소속 군인들이 구리(銅)를 빼돌려 압록강을 건너려다 보위부원들에게 적발되자 총격을 가하고 달아났다. 신의주는 북한과 중국 국경에 위치한 관문도시다.
중국을 오가는 사람과 물류가 이곳을 거친다. 바로 이곳 국경의 감시·경비 임무를 맡은 군인들이 밀수(密輸)를 하다 적발돼 총격이 오갔다는 게 이 사건의 요지다.
두 번째 사건은 2월 18일쯤 벌어졌다. 북한 경찰(보안원)이 시장(市場)을 단속하다 한 상인을 때리자 주변 상인들이 한꺼번에 달려들면서 시위가 벌어졌다(조선일보 2월 24일자 A1면).
이 두 사건 직후 신의주엔 특별 경계령이 내려졌다. 국가안전보위부와 군인들이 곳곳에 배치돼 주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일상생활까지 힘들어졌다고 한다.
이 두 사건을 관통하는 키워드(keyword)는 '돈'과 '시장'이다. 군인들이 '돈' 때문에 구리를 빼돌려 시장에 내다 팔려다 들통났고, 신의주 시위는 돈과 시장을 통제하려는 당국에 대한 항의에서 비롯됐다.
이런 일은 신의주 한 곳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지금 북한 전역에는 '장마당'이라 부르는 시장이 자리잡고 있다. 이 장마당 없이는 북한 경제가 몇 달도 버티기 힘들다.
1990년대 중·후반의 대(大)기근을 거치면서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배급제가 무너졌고, 북한 주민들이 그 대안으로 스스로 만들어낸 게 장마당이다.
장마당은 2000년대 들면서 북한 경제의 축으로 등장했다. 통일연구원의 탈북자 심층면접 조사를 보면 "북한에는 공식·비공식 시장을 통한 비(非)사회주의적 행동이 만연한 상태"다. 평양 주민과 특권층을 대상으로 한 특별 배급경제와, 일반 주민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장마당으로 나뉘어 있는 구조라는 것이다.
김정일 정권은 이런 장마당의 역할을 못 본 척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북한 권력은 장마당을 뒤엎을 힘도 없다. 오히려 약삭빠른 당과 정부·군·국영기업의 고위간부들은 장마당을 통해 재산을 불리는 데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김정일 정권은 종종 장마당에 도전장을 내민다. 2009년말의 화폐개혁이 대표적인 예다. 장마당을 통해 쌓인 북한 중산층 이상의 돈을 강제로 거둬들이겠다는 발상에서 꾸몄던 일이 바로 이 화폐개혁이다.
그러나 이 조치는 대재앙으로 끝났고, 박남기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워 작년 3월 공개총살했다. 장마당이 북한 권력과의 싸움에서 또 한번 완승(完勝)을 거둔 셈이다.
김정일 정권은 최근 다시 장마당 단속에 나섰다. 중동 민주화 시위 소식이 시장을 통해 퍼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한 북한 소식통은 북한 당국이 장마당 매대(좌판)의 칸막이를 없애라는 주문까지 하고 있다고 전했다.
상인들이 모여서 수군거리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전문가들은 2월부터 북한 곳곳에서 '생계형 시위'가 빈발하는 까닭이 장마당 단속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튀니지에서 시작돼 이집트를 거쳐 리비아를 휩쓸고 있는 중동 시위는 작년 12월 한 청년 노점상의 분신(焚身)에서 시작됐다. 그는 경찰 단속으로 그날 팔아야 할 청과물을 모두 빼앗기자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것으로 맞섰다.
이것이 계기가 돼 모두 합쳐 95년간 권좌를 지켜온 세 나라의 독재자들이 쫓겨났거나 축출될 위기에 내몰렸다. 북한 상황은 이들 북(北) 아프리카 3국보다 훨씬 열악하다. 경제 사정은 물론이고 민주화 시위를 이끌 만한 핵심 계층이나 사회적 구조조차 갖춰져 있지 않다.
작년 8월 조선일보는 신의주 '채하 시장' 현장을 담은 동영상을 보도했다. 이 동영상에는 억척스러운 40~50대 북한 여성들이 좌판에서 물건을 팔기 위해 손을 휘젓고 소리 지르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들 모두 최근 시작된 북한 당국의 탄압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다시 이 동영상을 보면서 이 아줌마들이 북한 권력에 쉽게 무릎을 꿇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장마당으로 상징되는 북한 체제 균열의 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깊게 자라고 있을지 모른다. /NKchosun
2011-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