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창간 90년에 북녘 형제자매의 고난을 생각한다

탈퇴한 회원
2017-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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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nksc

2010-03-05 10:01:42  |  조회 1486



조선일보는 1920년 3월 5일 첫 신문을 찍어냈다. 일본이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으로 조선의 국권(國權)을 빼앗으며 이 땅의 민간신문을 모두 강제 폐간시킨 지 10년 만에 조선일보가 처음 우리말 신문으로 이 땅에서 다시 숨을 쉬게 된 것이다.

 

일제는 바로 4달 전 조선총독부 규정을 바꿔 중학교의 조선어 과목 시간을 대폭 줄여 일본어 학습으로 돌리고, 조선역사·조선지리 과목을 일본역사·일본지리 과목으로 갈아치웠다.

 

우리 말 우리 역사가 교실 밖으로 내쫓기는 상황 속에서 망국(亡國)의 국호(國號)를 머리에 인 조선일보의 하루하루가 고달픈 것은 예상된 일이었다. 창간호를 발행하고 하루를 쉬고 제2호(3월 7일자)를 내고 또 하루를 쉰 후 제3호(3월 9일자)를 찍고는 긴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조선일보의 발행을 형식상 허가한 것은 조선총독부였지만, 우리말 신문을 허가하지 않을 수 없도록 총독부를 몰아간 힘은 바로 전해 이 땅을 뒤흔든 조선 민중의 독립만세 함성이었다.

 

일본 경찰이 줄이고 줄여 집계한 통계로도 3·1 독립운동의 규모는 적극 가담자 136만명, 이 가운데 감옥으로 끌려간 사람이 5만2730명이었고, 사망자 6770명, 부상자 1만4600명에 달했다.

 

조선 민중의 이 같은 희생이 없었더라면 엄혹한 무단(武斷)통치의 손아귀를 밀쳐내고 잠시나마 문화통치라는 이름의 비좁은 공간에서라도 우리말 신문을 발행할 꿈도 꾸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조선 민중의 고마움을 돌이켜보면 조선일보가 1920년 3월 5일 창간 이후 1940년 8월 10일 강제 폐간에 몰리던 날까지 핍박받는 조선 백성의 소리를 대변하면서 일제에 의해 8만8000여건의 기사를 압수당하고 500건 이상의 기사를 삭제당하고 4차례에 걸쳐 장기간 발행정지 당한 것은 조선일보의 당연한 보은(報恩)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조선일보사가 때론 일제의 노골적 압박으로, 때론 조선경제의 취약(脆弱)함으로 주저앉을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상재(李商在) 신석우(申錫雨) 안재홍(安在鴻) 조만식(曺晩植) 등 민족진영의 독립운동가들이 혹은 일신(一身)의 안위(安危)를 던져넣고 혹은 전 재산을 기울여 선뜻 조선일보 경영의 무거운 짐을 지겠다고 나섰던 것도 조선 민중과 우리말 민족 신문 사이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조선 민중은 (일제〔日帝〕의 제품이 아니라) 조선의 산물(産物)을 사용하자'는 물산장려운동, '민중의 지력(知力)을 높여 민족의 얼을 잃지 말자'는 한글교육과 문자보급운동, 신채호(申采浩) 문일평(文一平) 한용운(韓龍雲) 홍명희(洪命熹) 등 민족 사학자와 민족 문학가를 앞세워 전개한 조선역사와 조선문학 진흥운동, 분열된 좌·우파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結集)해 독립 역량(力量)의 확대를 시도한 신간회(新幹會)의 발족에 그들의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던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처럼 여러 갈래·여러 줄기로 이어져 온 조선 민족 갱생(更生)의 길과 조선 민족 재생(再生)의 방략(方略)은 1934년 방응모(方應謨) 사장 시절에 '정의 옹호' '문화 건설' '산업 발전' '불편 부당(不偏不黨)'의 조선일보 사시(社是)로 모아져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되던 날까지 조선일보를 받쳐주는 정신적 기둥 노릇을 해왔고, 그 정신은 해방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우리 국민은 지난 90년 세월 타(他)민족의 압제하에 신음하던 예속(隸屬)의 족쇄, 해방 후에서 정부 수립 사이 좌우의 유혈대립, 같은 민족이 같은 민족에게 총부리를 들이댄 6·25의 비극, 숙명처럼 수백 년을 내려온 가난의 질곡, 어느 분야에서나 꼴찌에서부터 세는 것이 빠르다던 후진(後進)의 멍에,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 더미 위에 장미가 피기를 바라는 것과 다름없다며 비웃음을 불러온 독재의 신산(辛酸)을 넘어서서 2010년 오늘 부강한 선진 민주 독립 국가로서 21세기의 첫 마루를 밟았다.

그러나 길고 긴 고난의 세월을 거치며 우리 국민은 '한국적'이란 단어에 '진짜가 아닌 가짜' '시대에 뒤떨어진 후진'의 뜻을 아무 거리낌 없이 담는 데 저도 모르게 익숙해져 버렸다.

 

독재가 '한국적 민주주의'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축재(蓄財)가 '한국적 자본주의'로, 지역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가 '한국적 선거 공학(工學)'으로 행세해 온 시절이 너무 길었던 탓이다.

 

이제 우리는 '한국적'이란 접두사(接頭辭)에 담긴 '진짜가 아닌 가짜' '시대에 뒤떨어진 후진'이란 불명예를 털어내고 '한국적'이라는 단어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한국적 보혁(保革) 정치'가 개혁하는 보수와 성찰하는 진보의 만남을, '한국적 기회의 평등'이 불평등의 세습화를 방지하는 조화로운 사회를, '한국적 노사관계'가 상생(相生)하고 상부(相扶)하는 협력의 노사관계를 의미할 수 있도록 판(版)을 새로 짜나가야 한다.

 

밴쿠버에서 스무살 김연아 선수가 얼음판에서 산뜻하게 날아올라 꿈꾸는 듯한 회전으로 원산지(原産地) 피겨가 무색하게 봄꽃처럼 피어나듯이 '한국적'이란 단어가 '세계의 표준'을 의미하는 시대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우리가 부강한 선진 민주 독립 국가 대한민국에 걸맞은 이 새로운 가치관으로 재무장할 때, 우리는 지난 65년 동안 민족의 허리를 두 동강 낸 채 버티고 선 '분단의 벽'을 허무는 열쇠를 손에 쥘 수 있다.

휴전선 너머의 '북한적 사회주의' '김일성 일족(一族)의 혁명 전통'이란 '후진적 가짜 체제' 아래에선 지금도 어린아이가 채 돌도 맞기 전에 죽어가는 비율이 남쪽의 10배를 넘는다.

 

북한 성인 남녀의 키가 우리 중학생 키보다도 작은 민족 왜소화(矮小化)현상이 벌써 10년도 넘게 계속되고 있다. 굶주림을 피해 압록강·두만강을 건너 만주에서 저 먼 몽골과 베트남·태국에 이르기까지 흩어져 방황하는 탈북자의 숫자는 얼마인지조차 어림할 수 없다.

 

 북한 부녀자들이 돈 몇 푼에 중국인의 첩살이로 팔려나가는, 눈뜨고선 보기 힘든 처참한 광경이 사시사철 이어지고 있다. 그들을 더 이상 '북한 주민'이라는 남을 부르는 듯한 차가운 이름으로 불러선 안 된다. 돋움발로 다가서는 도둑처럼 통일의 새벽이 밀려드는 날, 그들 모두는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보듬어야 할 형제자매들이다.

우리는 북한이 손에 든 핵무기와 미사일과 함께 이 미래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겪고 있는 인간 이하의 고초(苦楚)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고통을 완화시킬 비상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미래의 대한민국 국민의 현 상태를 개선할 길을 뚫지 못한다면 부강한 선진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영예(榮譽)도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일보는 오늘 창간 100년을 바라보며 창간 90년을 기념하는 이 자리에서 통일의 날을 대비하는 국가적·국민적 대책 수립을 촉구함과 아울러 2300만 북한 형제자매들의 고통을 시급하게 덜어줄 민족적·역사적·인도적 과업에 온 힘을 기울여 나갈 것을 밝히고자 한다.

 

그것이 조선일보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오늘이 있게 한 7200만 남북 동포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21세기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이 또 한 번 세계의 하늘 위로 비상할 활주로를 닦는 작업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Nkcho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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