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은 카다피나 무바라크와 달리 잃을 것 많은 쾌락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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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평중(한신대 교수)
카다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 같다. 약관 27세에 쿠데타에 성공한 후 장장 42년 동안 리비아를 철권통치한 그도 재스민 혁명의 태풍 앞에 난파 직전이다. 이쯤 되면 여느 독재자들은 비자금을 챙겨 황급히 도망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카다피는 '최후까지 싸워 리비아에서 순교하겠다'고 버틴다.
순교(殉敎) 운운은 공치사만은 아니다. '리비아 아랍공화국' 자체가 바로 카다피 자신이기 때문이다.
현대 리비아와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할 뿐 아니라 외세의 착취와 침탈에 저항하는 세계 혁명운동의 리더임을 자처해 온 그가 조국을 떠나 도망가는 것은 '혁명의 지도자'인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 될 터이다. 비무장의 동족에 대한 대량살육을 불사하는 것도 카다피의 눈에는 반대자들이 모두 '쥐새끼 같은 쓰레기 반(反)혁명세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리비아의 유일한 수입원(收入源)인 유전시설을 파괴하라고 카디피가 명령했다는 설도 있다. 그가 없는 리비아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스스로 확신하므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어릴 때부터 가꾸어 온 특유의 과대망상적 국가철학을 집약한 카다피의 '녹색 책'(그린 북)은 이런 예언자적 비전이 가득하다. 헌법·정당·계급·의회·투표를 철폐해 국민이 직접민주주의를 실행해야 하고, 모든 노동자가 동업자가 되어 완전한 사회주의의 생산적 사회를 이루어야 하며, 가족애와 민족주의를 결합한 이슬람공동체(Umma)를 건설하는 것이 '제3의 보편이론'의 목표라고 '녹색 책'은 역설한다.
공식 직위를 거부한 채 사막의 천막에서 명상을 하고 서구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통일아랍을 꿈꾸며 한국 기업도 참여한 대수로 공사로 국토 개조를 꾀하는 이력이 그 산물이다.
카다피의 금욕적 태도, 그리고 강력한 민족주의와 반(反)외세 사상이 한국 진보를 매료시킨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 대신 흉악한 강권통치가 제도화되고 극심한 빈부격차에다 나라 전체가 카다피 가문의 소유물로 전락한 오늘의 리비아 현실은 '녹색 책'의 허구성을 웅변한다.
그 폐허 위에 남은 것은 '죽느냐, 아니면 죽이느냐'의 권력의지뿐이다. 결국 리비아 사태는 카다피가 죽거나 아니면 리비아가 초토화되거나 중 하나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 지난 수십년 동안 카다피의 측근이었지만 유혈 진압에 항의해 사임한 전직 내무장관도 '카다피가 자살하거나 암살될 것'이라고 본다.
카다피는 여러 점에서 히틀러를 닮았다. 소련군이 베를린을 포위한 1945년 4월, 지하벙커에 칩거한 히틀러에게 참모들은 집요하게 도피를 권했다.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는 4월 30일 히틀러 자살 직전까지 설득을 시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자신과 국가를 동일시해 온 히틀러에게 '제3제국'이 이미 궤멸된 상황에서 자살은 불가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영웅적이기는커녕 최후의 히틀러는 공포와 환각에 시달린 병약한 노인에 불과했다. 자기 없는 독일이 온존하는 걸 인정할 수 없었던 히틀러는 독일의 모든 공장과 댐, 철로와 다리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자신의 죽음과 함께 제3제국도 한 줌의 재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세계 정복에 실패한 히틀러에게 만약 여력이 남아 있었다면 지구 전체를 파괴하고 말았으리라는 건 끔찍한 상상만은 아니다. 히틀러의 자살적 경향성은 저서 '나의 투쟁'을 비롯한 그의 언행에 대한 정신분석을 통해 예고된 바 있다.
다시 '고난의 행군' 상황을 맞은 북한은 공공연히 '핵전쟁의 참화가 한반도를 덮칠지 모른다'고 우리를 위협한다. 자신들을 구석으로 몰면 '너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권의 자살적 선동과는 달리 김정일은 자기파괴적인 카다피나 히틀러와는 차별화된다. 신비주의적 확신에 충만한 혁명의 창업자로서 개인적으로는 금욕생활을 한 카다피나 히틀러와 달리, 김정일은 온갖 권세와 사치를 누린 영악한 현실적 쾌락주의자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김정일은 잃을 것이 너무 많다.
자신의 왕국이 붕괴할 처지에 직면하면 김정일은 먼저 일신(一身)의 생존에 집착할 개연성이 크다. 고(故) 황장엽도 '김정일은 겁이 많아 전쟁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 못 된다'고 전한 바 있다.
그러나 '공화국(북한)이 없는 지구는 깨부숴 버려야 한다'는 호언(豪言)으로 김일성에게 칭찬받은 김정일의 망언(妄言)이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 능력과 결합할 때 그것은 단순한 허언(虛言)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 적어도 카다피와 히틀러에게 핵무기는 없었다. 이것이 바로 21세기 한국이 직면한 국가적 위기의 근원이다. /NKchosun
2011-02-28